박형준 작가 절단 - baghyeongjun jagga jeoldan

함께 부서질 그대가 있다면

by 박형준

박형준 작가 절단 - baghyeongjun jagga jeoldan

  이 책은 인문학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어떤 가치와 태도를 지닌채 살아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생각없이 살아왔던 내 삶에 하나의 생각, 삶에 대한 태도, 타인에 대한 자세 등등이 생긴다. 책에서 말한 소외되고 배제된 삶의 자리란 내안에서의 자리인가? 아님 계층을 말하는 것인가? 전자든 후자이든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외되고 배제된 삶의 자리 또한 챙기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어느 덧 내게도 가치관이라는 것이 생겼다. 일 때문이었을까? 소외되고 힘든 계층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비록 나의 영향력은 굉장히 비루하겠으나 함께 한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반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다. 그들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의 가치관이 다를 뿐. 그래서 그들을 설득하고 싶다. 아직 나의 영향력은 보잘 것 없지만..이 책은 내 마음 속에도 작은 불씨를 지폈다. 작은 일이지만 그 실천을 꾸준하게 1년 동안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 함께할 그대들이 있어 나 또한 외롭지 않다.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길 바란다.

  문학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문학의 필요성과 지금 시대의 문학의 정의를 이해하게 되어 한발자국 문학에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느껴졌다. 문학을 통해 나의 의식을 깨우치고 아니 타인의 삶에 대해 눈높이를 조정하며 그들의 삶게 가까워짐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좀 더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 공감능력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문학도 즐겨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인문학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많이 들어본 말이고 이전에 유명한 사람들이 만든 이론인가 했는데 저자가 정의한 '인문학'의 개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고가 하는 세계, 살고자 하는 세상과 방향이 유사하였다. 어려운 인문학을 알기 쉽게 정의해주고 또 어떤 삶과 태도, 가치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자가 정의한 인문학의 개념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 뜻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결코 잘 살 수 없다. 내 주변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정신을 발휘하자. ​위쪽을 갈망하면서도 아래쪽을 잊지 않는 겸손, 중심을 향하면서도 주변을 돌아보는 미덕을 지니자.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그 표현력이 부러웠다. 어려운 단어들이 있었으나 사회적인 문제와 자신의 경험을 결부시켜 설명하니 이해가 쉽게 되었다. 또한, 작가가 관심있는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해보았는지 느낄 수 있었는데 이렇게 짧은 글 실력으로 소감문을 적으려고 하니 부끄러워진다.

서   

모든 사물에는 물성이 있다. 한갓, 쓰레기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강탈할 수 없는게 있다. 마음이 담긴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비록, 폐품이라 하더라도 결코 빼앗길 수 없었던 이유이다.

  인문학은 우리 삶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기성찰인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며 차마 드러내지 못한 마음, 바로 그 마음의 표정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실천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문학자는 '마음의 고고학자'가 되어야 한다.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의 가치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허나 그것은 사상의 구조를 학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 시도이다. 이른바 사상의 인문학이 아니라, 마음의 인문학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인간 문명의 고양된 사상과 지적 성취가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문학은 소외되고 배제된 삶의 자리를 비추는 마음의 촛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하기 조차 어려운 비루함을 껴안은 채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힘 / 마음을 기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 역량을 감수성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마음의 인문학은 '감수성의 혁명'을 목표로 한다. 감수성은 감성과 달리 말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감수성이 풍부한(충만한)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다른 사람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슬픔에도 공감할 수 있다.

마음의 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차가운 지식'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삶/관계를 새롭게 정초하는 '따뜻한 교류'의 가능성이다. 또, 개개인의 감수성을 증진하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곧장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감수성의 영역과 척도 역시 달라지는 까닭이다. ∴ 감수성의 지속적 갱신과 함께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가치/제도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과 현실 정치를 통해서만 구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인문학이란 부서지고 갈라진 삶의 박토에서도 후우~ 후~, 마음의 화로에 다른 생의 숨길, 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불어넣는 생의 의지이다. 그 작은 마음의 불씨를 다시 뜨겁게 지필수만 있다면,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조금은 덜 외롭고 슬프지 않겠는가. 우리의 곁에는 함께 부서질 그대, 그대가 있으므로

1부  감수성,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1. 문학을 읽는 이유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 문학이 예술사회학적으로 그 수명을 다했다. "  - 문학이 전쟁이나 환경, 전지구적인 경제 격차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입안하기 어려운 매체가 되었다. ( 문학이 더이상 정치적인 아젠다를 전파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대중적 미디어 기능을 갖지 못함 )

But, 문학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조망하고 감각하는 생활 매체의 역할 수행

                             => 우리 삶의 다양한 결을 발견하고 그 모양을 창의적으로 조형하는 문화적 디자이너의 임무 수행.

                                       -> 오늘 날 문학의 성립 조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은 사물의 본성과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독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

                                        즉, 문화적 감수성의 활성화에 기여

    

감성    - 일상의 언어적 규칙과 통사적인 정보를 자동화하여 수용하게 하는 감각체계

감수성 - 일상적인 흐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새롭게 감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감지 능력

 ∴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이와 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면, 사회적 안전망의 바깥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등지는 이들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문학적 감수성이 말하는 공감에너지는 타인의 변화를 강요하는 '계몽적 개조'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를 조정함으로 타자의 삶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자기 혁명'을 지향함!

∴ 문학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문화적 의사소통을 통해 새롭게 재편하고 '문학적인 것'을 어떻게 각자의 삶 속에서 재구성하여 공통의 문화적 자산으로 나눌 것 인가하는 문제와 결부 ==>  "삶으로서의 문학" 이라 부름!

 

2. 슬픈 인문학

타인에 대한 이해나 고통의 체화없이 그들의 삶과 아픔을 간접적으로 기술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이들 사건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는 것에 대한 윤리적 의문을 스스로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문학과 예술, 혹은 인문학은 생사를 건 약자의 투쟁을 기록하고 공유해야 하며, 또 그장면과 순간을 기억하고 해석해야 할 책무가 있다. But, 자칫 작가와 비평가의 아름다운 문장 속에서, 혹은 그 기막힌 카메라의 시선과 렌즈 속에서, 정작 고통받는 이들의 삶은 전시되고 휘발되어 버릴 위험 또한 없지 않다.

​* 지금의 문제점 : 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는 우리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파하는데는 관심을 덜 두거나 초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는?

우리 삶 전체를 주검의 전시장으로 만들고 있는 '무능력한 국가'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자유와 글쓰기에서 작은 가능성을 찾는다.

​즉, 자기 생의 현재 '상태'를 개선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출세나 성공만이 아니라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디자인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병행되어야 함. 

   =>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바르게 설계하고 운용할 책임이 있음을 환기해주는 계기가 됨.

But, 현실 효과는 더디고 미약.. 그리하여 슬픈 인문학

​3. 마음의 거리

소설에서 '거리(Distance)' - 자신(나)과 대상(사물), 자신(나)과 타인(너) 간격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서사적 장치

주체와 대상, 대상과 대상사이의 거리는 소설의 어조나 분위기, 나아가서는 주제와 담론 결정에도 중요한 기능을 함.

=> 소설에서의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미적거리를 지향하고

    소설을 독해하는데 필요한 서사적 자원과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

심리적 거리에 대한 감각이 타인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는 사실은 일상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됨

ex) 사람은 신체와 공간이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충분히 거리감을 느낄 수 있음.

인문학적 실천 -> 주체와 타자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

    '공동체','공통적인것' < 가까이 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지하며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시인 김수영

"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 "

지식인이 있기는 하지만 민중의 귀에 닿는 말을 하는 지식인은 없다. 즉,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태도가 인문학을 하는 이들에게 요구된다.

​4. 분석주의를 반대한다

공포와 불안을 '일시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피'

ex) 학창 시절 수 많은 시를 접하였으나 자기 스스로 시를 읽거나 감상하는 경험을 가지지 못함.

     경험하지 못한 것은 두려움의 대상

      -> 시 읽기는 공포와 불안의 대상 -> 회피

우리는 분석주의를 당호하게 반대하여야 한다.아니 정확히 말해 '분석주의'를 가장한 암기식 교육에 반대 

   시작품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되어있는 의미를 찾고 정답은 추론하는 시험과정으로 독자를 내몸

 => 우리 시대의 시 읽기는 이 '정답(의미) 찾기'과정에서 자유로워질 때이다.

5. 인문학이라는  촛불

인문학의 도구화 -> '경쟁'과 '성장'의 원리에만 충실한 자본주의 병폐를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효과를 발휘

                                                                  지금 자본주의 체계 - 사회적 소수자나 경제적 약자를 배려할 수 없는  생산 / 분배

                                                                 구조와 착취 시스템을 내장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개선이 필요함.

But, 인문학이 곧장 반자본주의적 혁명을 추동하는 것은 아님

ex)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가 '공산당'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위의 책들은 자본가의 착취가 아무 거리낌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어낸 것

 즉,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마르크스가 인식했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감각하기 위한 것.

* 진정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 why? 인문학은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을 비추는 지식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인문학을 지향하여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비추는 '마음의 촛불'이 되어야 한다. 

​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내파하는 '불화의 시선'을 기르는 과정

       => 불평등보다 공평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자기자신의 시각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자기혁신'의 과정

           타인을 이해하고 공통의 삶의 조건을 모색하는 '자기혁명'의 길이며

           자기 생신을 통해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실천

6. 덧셈되지 못하는 삶

대한민국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주여성과 자녀, 그리고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와 '오차 없는 수치'만이 아니다.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통계의 대상과 범위에 포함되는 이들을 위한 학문이나 지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오히려 이러한 국가적 통계의 바깥에 놓여있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고이자 학문이다. 각종 통계의 수치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배제'되어 있는 존재, 혹은 아에 국가-법률의 통계 수치 바깥에 놓여 있는 존재를 감각학고 감지하는 사고와 활동이 '인문학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이다.

다문화 사회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할까.

'다문화 사회'의 해법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오히려 타자에 대한 '차별'을 생산하는 선험적인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다문화적 사유와 실천은 우리와 다른 '차이'를 발명하고자 하는 분별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너와 나의 접지를 발견하는 공통성에 대한 사유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결정짓는 '차이의 문화론'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보편적 인류애'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7. 비평이라는 균형감각

비평의 탄착점은 부조리한 타인과 외부를 겨냥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내부의 윤리적 심장부를 겨누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 비평가란 끊임없이 '자기로부터의 망명'을 시도하는 존재

​스스로에게 아무리 엄격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통어하고 성찰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도, 출판사에도, 심지어 비평가에게도, 자기 자신을 향한 '비평'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비평 -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가치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도록 '생의 균형 감각'을 유지해주는 것이 비평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중용]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이야기한 것과 같이, 비평은 우리 삶이 양극단으로 치우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평행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비평의 균형 감각은 양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균형의 균형의 회복을 위한 윤리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쪽을 갈망하면서도 아래쪽을 잊지 않는 겸손, 중심을 향하면서도 주변을 돌아보는 미덕, 바로 그 주저함과 머뭇거림이 동시대에도 여전히 비평을 읽고 쓰는 이유이다.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묻고 또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주의ism'의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밝고 환한 수면 위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이는 높고 푸르른 하늘을 등진 채, 어두운 수면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빛이 박탈된 심해 속으로 잠항하기도 한다. 그것은 검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죽음과 병마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난파된 세상의 구조 신호에 응답하는 '목숨을 건 하강'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용기'라고 부르며, 또 그것은 "실종자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라는 마음의 연대를 실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거짓말이다, 185쪽)

이 책의 핵심은 눈물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의 망각을 넘어선 슬픔의 정체, 바로 그것을 마주하는 용기와 분노이다. 여전히 세월호의 진실은 인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수중에서는 눈물을 아낄 것, 눈물을, 아낄 것.

2부 브릿지, 단절된 역사/일상을 연결하는 힘

사랑의 혁명

사랑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물성 전체를 변화시키는 적극적 변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과거와의 절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명하는 일상의 봉기, 다시 말해 사랑은 통속적이거나 수동적인 정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관성적인 삶의 방식을 절단하고 인습적인 생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정동의 발현이자 폭발적인 사건 그 자체인 것이다. 

사랑이 개인(간)의 변혁적 가치에만 국한된 개념이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은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연대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결속과 연대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시/공간을 생성해낼 수 있다.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 남녀 간의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말했다. 즉, 사랑은 '나'와 '타인'사이에 새로운 관계 접지를 구성하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 행위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사랑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대'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 저 참을 수 없는 혁명적 에네르기야말로, 개인과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동affect'의 기운이라 말할 수 있다.

​판도라의 잔여물

불안 - 예견 가능하거나 예측 가능한 것들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공포 - 측정 불가능하거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무차별적이고 불확실한 사건과 존재에 대한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

∴ 공포는 개개인의 심적 연약함이나 미약한 정신 상태에서 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재앙은 미묘하게

오정희 단편소설 - 소음공해

주인공 '나'는 문화적 소양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지니고 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러나 결말부에서 보듯, 사실 '나'는 자기중심적인 생활가치와 규범을 타인에게 과시하는 쁘띠부르주아적 개인일 뿐이다. 여기에서 '나'의 고상한 가면은 철저하게 부서진다. 

인간은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단절과 불신은 공동의 삶을 재앙으로 내모는 단초가 된다. 층간 소음 문제는 단순한 주거 갈등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묵시록적 징후일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의 몰락은 저 먼 외계의 침공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찌질하고 미묘한 '관계적 재넌'으로부터 개시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공동주택의 층간소음 문제를 사적인 갈등이나 분쟁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와 '소통'의 문제로 재인식하여야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공통의 삶을 정초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실천의 가장 일상적 형태라는 점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겠다.

누구나 벗어나고 싶은 삶과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속에도 분명 당신이 찾지 못한 '반짝반짝, 빛나는'희망의 자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정임의 작품은 동시대 청년들의 처절한 생존 고민과 함께,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강풀의 따뜻한 작가 의식이 부각된다.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가슴 속에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씩은 지닌 채 살아간다는 것.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중요한 방법은 비밀을 은폐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아니라, 누군가 한 명쯤은 그 사연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마음의 '든든함'을 얻는 것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어두운 밀실에 자신의 상처를 격리시키는 폐쇄적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마음과 마음의 '움직임(무빙moving)'인 것이다.

​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타자와의 그러한 관계 맺음을 '결속'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결속의 '브릿지bridge'를 놓는 마음의 무빙. 타자를 향한 무한한 마음의 움직임(무빙)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생의 자원이자 구원의 방식이 아닐까. 그러므로 다시, 다 함께 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