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마케도니아 - albania maked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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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 지방을 둘러 싼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와의 갈등 이외에도 접경하고 있는 다른 이웃 국가

알바니아와도 갈등을 겪고 있다.

공산 알바니아 이후, 점차 강해지고 있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알바니아 국경 밖의 알바니아인 거주지역을 모두 알바니아로

통합하여 '대 알바니아'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코소보 내전, 그리스와의 갈등을

가져왔고 마케도니아에서도 알바니아인 문제를 낳았다.

2015년 기준으로 마케도니아 인구는 약 200만명이며

그 중 알바니아인은 1/4인 25%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알바니아인과 협력하는 터키인 약 4%를 합치면

알바니아-터키인은 약 30%정도에 달한다.

특히 알바니아인은 마케도니아-알바니아 접경지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코소보, 그리스 동북부 일부, 마케도니아 서부를

알바니아가 되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시기

알바니아의 국력이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에 비해

매우 뒤쳐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마케도니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이고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양측이 모두 공산권이었을 때는 비교적 민족주의가 억제되고

양측간 국력차 등의 이유로 갈등이 진정국면이었으나

1991년 공산 유고가 해체되고 마케도니아가 독립하고

공산 알바니아가 무너지자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1년 9월 독립선언 이후,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이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는 공산 유고 하에서 낙후된 1차 산업 중심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마케도니아는

바다로의 출구까지 일어 수출입에 큰 문제점을 가졌고

이는 1991년 부터 1992년까지 약 1년동안 월 90%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하였다.

여기에 마케도니아 무역량의 60~70%를 책임져주던 세르비아가

유고슬라비아내전과 보스니아내전의 주역으로

국제적인 경제 제재 조치를 당하자, 마케도니아는 1992년 12월,

국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또한 그리스는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테살로니카를 봉쇄하는 등

마케도니아에 피해를 입혔다.

이런 혼란 와중, 마케도니아가 마케도니아 밖의 영역에 탐을 내던것 만큼이나 마케도니아 내부의 소수민족들도 마케도니아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마케도니아 독립시기,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마케도니아 독립국가는 마케도니아 단일 민족구가가 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알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은

자치 공화국 설립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을 크게 자극했던 점은

마케도니아의 선거가 공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은 대개 25%정도의 비율을 유지하였는데 독립 직후 의회선거에서 마케도니아 의회에서

알바니아인 의원은 15%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게리멘더링을 통해

마케도니아인에 유리한 선거구를 확정했기 때문으로

알바니아인들을 매우 자극하였다.

마케도니아 중앙정부가 알바니아인을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생각하자 서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과 마케도니아 중앙정부

사이의 갈등은 심각해졌고 양측이 지방정부를 따로 세우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 1992년 7월 마케도니아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 민족 정당 당수 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키고

수도 스코페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이 알바니아인 불법 담배

노점상들을 가혹하게 폭행하면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1993년 1월, 마케도니아 내부의 알바니아인 자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알바니아인 무장조직이 찰설되었으나

동년 11월 마케도니아 중앙정부가 강제 해산하였다.

강제해산 직후, 알바니아 민족정당들은 마케도니아정부가

극단적 무장조직들을 배제하는 것에 찬성하는 대신

알바니아어를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공용어로 인정해 줄 것,

서부 마케도니아에 자치공화국을 설립해 줄것을

요구했으나 마케도니아 정부가 거부하였다.

이런 갈등은 1995년 알바니아인들이 실력양성을 위해

서부 마케도니아에 알바니아인을 위한 대학교를 설립하려던 것을 마케도니아 중앙정부가 강제로 철거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가 마케도니아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폭발하였다. 이어 1998년에는

알바니아 무장단체가 마케도니아 법원, 경찰서 등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지속되었다.

마케도니아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운 와중,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에 의한 알바니아인 학살을 피해

알바니아인들이 마케도니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자

마케도니아 중앙정부의 위기감이 매우 고조되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들어오자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비율은 더욱 증가하였고 코소보 알바니아 반군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반군의 연대로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마케도니아 경찰과 행정조직에 대한

공격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어 2001년 3월에는 알바니아 반군이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마케도니아 정부군을 밀어내고 점령지를 확대하는 등

취약한 경제력으로 형펀 없는 무장을 갖춘 마케도니아군을

압도하였다.

마케도니아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영행력을 급속히 잃자

서구가 마케도니아에 개입하였다. 서구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지지성명, 물자지원, 고문단 파견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마케도니아를 지원하였다.

이는 서구, 특히 EU가 마케도니아가 붕괴될 경우

그리스-불가리아-세르비아-알바니아가

마케도니아를 사이에 두고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붕괴를 막는 것이 이지역의 현상유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구 뿐 아니라 발칸 슬라브국가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러시아도 마케도니아를 지원하였다.

서구와 러시아는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를 봉쇄하고

2001년 3월, UN선언문을 통해 알바니아 반군에 항복을 요구하였다. 알바니아 반군이 이를 묵살하자 3월 22일 서 마케도니아를

폭격하고 마케도니아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러시아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군은 알바니아 반군의 반격에 서부 마케도니아를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2001년, 7월 5일 마케도니아 정부와 알바니아 반군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서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자치권

논의와 알바니아 반군 무장해제를 서로 맞교환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자치권을 인정 받는 대신

알바니아와의 통합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합의 이후에도

중앙정부-자치정부의 갈등,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양측 인구가 접경한 지역에서는

쌍방간에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불안정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