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4장 13 절 - jam-eon 24jang 13 jeol

본문 잠언 24:1-34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악인의 형통1(1-10절)
잠언 1-9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왕이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될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던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10-24장에는 솔로몬왕과 지혜자들이 전한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그중에서도 10:1-22:16까지에는 솔로몬왕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의 은사로 말한 단편경구(어록) 375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22:17-24:34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잠언입니다. ‘솔로몬 제2잠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부분입니다.
(1-2)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윤리적,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그것이 전부라면, 성경은 윤리교과서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께 등을 돌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면, 가장 크게 여겨지는 죄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과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 후회가 되고, 참회가 됩니다.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그 사람들에게 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부러워하면 “저 사람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고 생각하며 따라하게 되어, 자신도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함께 있으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처럼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19-20)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그들이 가는 길은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쌓은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3-4)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집’은 ‘건물’을 뜻하기도 하고, ‘가정’, ‘가문’, 더 나아가 ‘국가’를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리고 ‘지혜’와 ‘명철’, ‘지식’은 모두 비슷한 의미로 ‘말씀’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입니다. 좋은 집일수록, 큰 집일수록, 높은 집일수록 설계가 좋아야 합니다. 설계가 좋지 않거나 없으면,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집을 지을 곳이 지진이 있는 곳이면 더욱 그러합니다.
집은 지혜와 명철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견고하게 된다’고 하고, 방들은 ‘채우게(채워지게) 된다’고 모두 수동태로 표현합니다. 가정과 국가를 바르게 세워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 지식이 아니라면, 인생에 비바람이 불어대고,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더욱이 인생에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의 힘으로는 이기거나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5-6)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힘이 센 사람보다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강하고, 기운이 센 사람보다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면 전략을 세워야 하고, 참모가 많아야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인생을 바르고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출발이자 과정이며, 마침입니다.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우리의 인생에 환난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우리의 실상, 한 없이 약한 우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이 오기 전에 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환난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출발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환난은 무너짐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2(11-22절)
(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와 ‘살륙을 당하게 된 자’는 모두 ‘복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죽을 죄를 지어서 끌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고함에도 유죄판결을 받았거나,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건져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것이 당연하듯,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혹 외면하는 일이 있다면, 행위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선벌악’,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건물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사고나 지진과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살아 있는 사람의 지위고하나 빈부귀천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으면, 그 어떤 죽은 사람보다도 우선해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사망자를 수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물보다 우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해처리를 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13-14)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지혜와 명철인 하나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송이꿀’은 ‘최고 품질의 꿀’을 의미하기도 하고, ‘벌집에서 흐르는 꿀’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꿀을 예찬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나 꿀이 얼마나 좋은 식품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꿀의 특징을 두 형용사로 표현을 합니다. ‘좋다’와 ‘달다’입니다. 꿀은 몸에도 좋고 먹으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의 말씀도 우리의 영혼에 유익합니다. 그래서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 좋을 뿐 아니라 달다고 합니다. ‘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입으로 맛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 간장광고의 유명한 CM송이 있었습니다.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맛을 보고 맛을 아는 00간장”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단맛이 있습니다.

(21-22)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하나님과 왕을 나란히 세우며, 경외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합당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함은, 왕정시대에 최고의 죄는 ‘역모’입니다. 역모는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없기에 역모를 저지른 사람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인척들까지 함께 참수합니다. 눈에 보이는 왕에 대한 역모가 그러하다면,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역모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짓는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잠언(23-34절)
22:17-24:34의 잠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혜자의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22:17-24:22의 지혜자와 23-34의 지혜자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23절이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로 시작됩니다.

(23)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공정한 재판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만약 악한 사람(죄인)을 옳다고 하면 백성들로부터 저주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재판을 할 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안 되고, ‘안면무죄 생면유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은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적당하다’의 원 의미는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알맞다’인데, 지금은 ‘대충하다’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본문의 ‘적당’은 ‘올바름’, ‘공정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입맞춤’은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서양에서는 친밀함의 표현으로 볼을 맞추는데, 그것과 유사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경은 26절을 ‘바른 말을 해 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언어에 진실함과 올바름을 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태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끝이 나는데, 30-34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화장실을 보면 그 집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실’이 감추어진 곳, 드러나지 않는 곳을 정리를 하면 드러나는 곳은 당연하게 정리를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정리가 되었음에도 화장실이 정리가 되지 않은 집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화장실보다 더 그 사람과 집을 알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밭’과 ‘포도원’입니다. 밭과 포도원은 농부에게 생명과 같은 곳이고, 관심과 정성의 초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곳들이 가시덤불과 거친 풀(찔레)이 가득하고, 돌담이 무너져 있다면 들어가 돌보기도 힘든 상태인 밭, 완전히 황폐화된 밭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보고서 지혜자의 생각이 깊어졌고, 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혜 없고, 게으른 농부의 밭을 보며,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본 것입니다. 타인의 삶을 자신에게 타산지석으로, 반면교사로 삼은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고, 깨달은 귀로 들으면 세상은 진리를 깨우쳐주는 교과서와 같습니다.
33절에는 ‘좀 더’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조금의 잠’, ‘조금의 졸음’ ‘조금의 손을 모음’이지만, 그 ‘조금’이 합해지면 인생 전부가 됩니다. 빈궁(가난)이 ‘강도 같이’ 오고, 곤핍(빈곤)이 ‘군사 같이’온다고 합니다. ‘강도 같이’는 예상하지 못한 때입니다. 그리고 ‘군사 같이’는 방어할 수 없게입니다.
시인 바이런(G. G. Byron)이 말한,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집니다. 즉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의 삶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오늘의 삶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명철, 지식으로 집을 짓고, 꿀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도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고 지혜 없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면,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통해서는 얼마나 깊은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소망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일터를 세워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버리고, 지혜와 명철, 지식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 집을 건축하는 설계도와 지침서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꿀과 송이꿀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날마다 먹어, 그 맛의 깊이를 평생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실하게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일의 생활 가운데 우리의 언어가 바르고, 지혜롭고, 따뜻하여 사람들을 세워주고 살리게 하시고, 언제나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며, 주어진 삶에 신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도 형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해 보신 적 있습니까?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2.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맛을 깊이 느낀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그 말씀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서, 또 그 맛을 경험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결심해 보시겠습니까? 구체적으로 결심해 보십시오.
3. ‘좀 더’, ‘좀 더’, ‘좀 더’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좀 더 깨어 있고’, ‘좀 더 신실하며’, ‘좀 더 부지런’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