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언어·문자개념용어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정의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요약문 한글은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이다. 어려운 한자를 빌려 문자로 사용할 경우 민족의 정서는 물론이고 정확한 정보 기록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일반 민중은 말 이외에 의사를 기록하고 전달할 방법이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글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과, 천지인의 모양을 본뜬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인 음운학 연구를 토대로 누구나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로, 세계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문자이다. 개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들 민중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도리가 없었으며, 편지를 쓰려고 해도 그 어려운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농사일에 관한 간단한 기록도 할 방법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이러한 딱한 사정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던 성군으로, 주체성 강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은 남의 글이므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더라도 매우 어색하여 뜻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그 밖의 다른 나라 글자들은 도저히 빌려 쓸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당시의 상황은 새 글자를 만들어 낼 만한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고려 말기 몽고에게 당한 곤욕으로, 그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갈음 시기에 즈음하여, 나라 안에서는 자아 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주위의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한자를 빌려 썼는데, 그것으로 우리말을 적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정인지의 표현을 빌리면,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던 이두글[吏讀文]은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비단 품위가 없고 체계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한다(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훈민정음 해례) ”고 하였다. 이처럼 일반 백성의 글자 생활은 극도로 빈곤 상태에 있었다. 셋째, 세종의 개인적인 역량은 새 글자를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여 성군으로서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였고, 외국 세력에 대하여 우리를 지키려는 주체성이 강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민본 정신이 투철했던데다 혁신적인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감한 성격을 겸비하고 있었다. 넷째, 집현전에는 세종의 이러한 정책을 도울 만한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섯째,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통역을 길러야 했는데, 그들을 과학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소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 운학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운학의 체계는 새 글자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세종은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냈는데(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의 끝에 실린 정인지의 꼬리글에 따름), 이러한 독창적인 글자를 만든 일은 세계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다. 훈민정음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원본 『훈민정음』은 설명문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훈민정음 본문이 실려 있고, 다음에 훈민정음 해례가 있다. 해례는 ‘제자해(制字解)’·‘초성해(初聲解)’·‘중성해(中聲解)’·‘종성해(終聲解)’·‘합자해(合字解)’·‘용자례(用字例)’로 다섯 가지 ‘해(풀이)’와 한 가지 ‘예 (보기)’로 되어 있다.
한글에 대한 이름 한글을 일컫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당시에는 ‘훈민정음’이라 불렀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때의 소리는 글자와 통한다. ‘바른’이라는 꾸밈말을 붙인 이유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과 같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훈민정음』은 바로 이 이름을 쓴 책이고, 그 밖의 여러 문헌에도 이 이름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이름은 훈민정음 해례의 끝에 있는 정인지의 글에 이미 나타나 있다.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은 최근까지 쓰였는데, 이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말이다. 원래 ‘언’이란 ‘우리말’ 또는 ‘정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에 보면, “문(文)과 언(諺)을 섞어 쓸 때는……” 또는 “첫소리(초성)의 ㆆ과 ㅇ은 서로 비슷하여 언에서는 가히 통용될 수 있다. ”라고 하였고, “반혓소리 ㄹ은 마땅히 언에 쓸 것이지 문에는 쓸 수 없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언’은 우리글·우리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실록』에는 언문청(諺文廳)이라는 말이 나오고(28년 11월조), 또 바로 ‘언문’이라는 말도 나타난다(25년 12월조). 또, 그 뒤로는 ‘언서(諺書)’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한 데 대립시킨 말이다.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 訓蒙字會』에서는 ‘반절(反切)’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중·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중·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암클’이라는 이름도 쓰였으니, 이는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선비가 쓸 만한 글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08년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바로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 4월에는 다시 그 이름을 ‘한글모’로 고쳤다. 이 때부터 ‘한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듯하며,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27년 한글사에서 펴낸 『한글』(7인의 동인지)이라는 잡지에서부터이다.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우리글을 ‘언문’이라 낮추어 부른 데 대하여,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권위를 세워 준 이름이다. 이는 세종이 ‘정음’이라 부른 정신과 통한다 할 것이다.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 인류의 참된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록이 없는 시기는 역사 시기가 되지 못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 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많은 비석문을 비롯하여 개인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들이 있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 놓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 한아버지(할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한 언어는 그것을 모국말로 하여 자라는 겨레의 생각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여러 민족의 생각하는 방식이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문은 그 어휘나 문법의 체계에 있어 중국의 말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한문으로 된 기록은 바로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참된 모습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기록들은 그 양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기록 당시의 언어를 복원하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참된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 때부터 우리 한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게 되며, 그 생생한 감정의 움직임을 바로 피부로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참된 역사 시기가 열리며, 참된 국문학이 시작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말 자체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부터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참된 우리 겨레의 역사 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우리 겨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훈민 정책과 훈민정음 세종이 표기 수단이 없는 백성들에게 이를 마련해 주기 위해 15세기 중세 국어를 토대로 하여 국어의 문자화(文字化)에 성공하고,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화 사업(敎化事業)을 실시한 것을 훈민정음에 의한 훈민 정책이라고 한다. 실지로 애민 사상이 남달리 강했던 세종은 조선 건국 초부터 표방해 온 왕도정치사상(王道政治思想)·천도사상(天道思想)·예치주의사상(禮治主義思想)·법치사상(法治思想) 등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 국가로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정신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훈민정음은 대개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된 이래, 새 글자의 음가와 사용법을 설명한 한문책 『훈민정음』(1446년 간)과 『훈민정음국역본』(1447)에 이용된 것을 비롯, 경서·불서(佛書)의 번역,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 편찬, 『농사직설 農事直說』·『간이벽온방 簡易辟瘟方』과 같은 실용 위주의 책, 『유합 類合』과 같은 한자 교과서, 『내훈 內訓』 같은 교화서(敎化書),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 작품 표기에 이용되었다. 이들을 분야별·시대별로 개관해 보면, 훈민정음은 창제된 뒤 조선 건국을 찬양하기 위해 편찬된 『용비어천가』(1447년 간) 안의 국문 가사를 표기하는 데 가장 먼저 쓰였고,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 分類杜工部詩諺解』(1481년 간) 표기에 쓰였다. 훈민정음 창제 사업과 함께 『동국정운』(1447년 간)을 편찬하고, 새로 바로잡은 우리 나라 한자음(漢字音)을 보이기 위하여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백성을 위한 하나의 교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 중국 본토자음(本土字音)을 나타내기 위해 편찬된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또, 15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유합』과, 1527년(중종 22) 최세진이 편찬한 『훈몽자회』, 그리고 이보다 앞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천자문 千字文』과 같은 아동용 한자 입문서에서도 훈민정음으로 석(釋)주 02)과 음(音)을 표기하여 학습 효과를 거두도록 했는데, 이러한 예가 훈민정음이 교화 사업에 쓰인 가장 좋은 본보기에 속한다. 이상과 같은 아동용 계몽 서적 이외에 훈민정음 창제 직후부터 한문으로 쓴 교화 서적을 번역하여 백성들이 쉽게 읽도록 하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먼저 세종의 명에 따라 1434년에 편찬, 간행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가 세종 때부터 성종 때(1481년경)에 걸쳐 번역, 간행되었고, 부녀 훈육에 필요한 대목을 『소학 小學』 등 4책에서 뽑아 편찬한 『내훈』도 1475년 번역문과 함께 간행되었다. 이러한 교화 서적으로는 본받을 만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행실을 담은 내용을 모아 1518년 편찬, 번역한 『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가 있으며,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도 1514년에 편찬, 번역, 간행되었다. 또,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지침서로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1518년 간)과 『정속언해 正俗諺解』(1518년 간), 『경민편 警民編』(1519년 간) 등이 번역, 간행되었다. 훈민정음은 의서와 농서(農書) 등 일반 대중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야에 있어서도 훈민용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의서 분야로는 『구급방언해 救急方諺解』(1466년 간), 어디서나 구급용으로 쓸 수 있도록 편찬, 번역된 『구급간이방 救急簡易方』(1489년 간)을 비롯, 『촌가구급방 村家救急方』(1538년 간), 『간이벽온방』(1525년 간), 『우마양저염역치료방 牛馬羊猪染疫治療方』(1541년 간), 『분문온역이해방 分門瘟疫易解方』(1542년 간) 등이 있고, 농업 분야 서적으로는 강희맹(姜希孟)이 편찬한 『금양잡록 衿陽雜錄』(1492년경 간)과, 세종 때 한문으로 편찬하고 후대에 번역한 『농사직설』 등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국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이를 널리 읽히려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부터 사서오경의 번역이 추진되어, 먼저 구결(口訣)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다음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 그 번역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경서의 번역(언해) 사업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유교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상에서 열거한 경서·의서·농서·계몽서 이외에도 사회 교화를 위한 서적의 간행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서적들은 대개 교훈을 위주로 한 내용이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광해군 때에 이르러 효자·열녀·충신의 행실을 본보기로 보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년 간)가 간행되었으며, 인조 초에는 『오륜가언해 五倫歌諺解』, 숙종 때에는 중종 때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 童蒙先習』이 번역, 간행되었다. 영조 때에는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경민편언해』·『내훈』 등이 중간되는 동시에 『어제여사서언해 御製女四書諺解』(1736년 간)·『어제상훈언해 御製常訓諺解』(1745년 간) 등이 간행되어 사회적인 귀감을 보였다. 영조 이후 두드러진 특징은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문장을 통해 교훈을 내린 윤음(綸音, 원문은 한문)이 많이 간행된 것이다. 영조 때부터 『어제계주윤음 御製戒酒綸音』(1757년 간)·『유중외대소신서윤음 諭中外大小臣庶綸音』(1782년 간)·『유호남육읍인민윤음 諭湖南六邑人民綸音』(1794년 간) 등 수많은 윤음이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윤음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척사윤음 斥邪綸音』(1839년 간), 임오군란 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내린 『유팔도사군기로인민등윤음 諭八道四郡耆老人民等綸音』(1882년 간) 같은 것도 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나 훈민정음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은 창제되자마자 불경 번역에 이용되었는데, 이는 어려운 불경(한문)을 쉽게 번역하고 알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1447년에는 벌써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된 『석보상절 釋譜詳節』의 표기에 훈민정음이 이용되었고, 같은 해 간행된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석가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500여 곡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였다. 그 뒤 세조 때에 이르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어 대대적으로 불경의 번역 간행 사업이 진행됨으로써 상당한 분량의 15세기 중세 국어 산문(散文)이 훈민정음으로 표기되었다. 간경도감에서는 『능엄경언해 愣嚴經諺解』(1462년 간)·『법화경언해 法華經諺解』(1463년 간) 등 10여 종의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고, 그 뒤로도 역대 왕 또는 왕비 등에 의해 불경이 여럿 간행되었으며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이 밖에 훈민정음은 『오대진언 五大眞言』(1485년 간)과 같은 범어(梵語)주 03)로 된 불경의 음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였다. 이상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역대 왕들이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훈민정음을 얼마나 사용해 왔는가를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기까지도 조선의 공용어 및 공용 문자는 어디까지나 한문과 한자였다. 그러다가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1894년 11월 21일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本)을 삼고, 한역(漢譯)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뒤부터의 일이다. 물론, 이 법령이 바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무렵에 이미 훈민정음만으로 신문·문학작품·종교서적 등이 간행되기도 했으므로 백성들을 깨우치는 데 훈민정음이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국문 문학의 발전 과정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문 문학의 본격적 개화의 길을 열었다. 정음의 반포에 앞서 1445년 한글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인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역성 혁명을 합리화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총 125장의 악장체 영웅서사시이다. 단편적 사실을 각 장별로 서술하고 있어 본격 영웅서사시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국문 서사시의 선편을 잡은 작품이다. 1447년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석보상절』은 『석가보 釋迦譜』의 내용을 국문으로 옮긴 것인데, 후대의 불경언해류와는 달리 아름다운 우리 문체로 된 산문 서사문학의 최초의 작품이다.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같은 해인 1447년 석가의 공덕을 예찬하여 친히 악장체의 장편시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후에 세조는 1459년 위의 두 작품을 합편하여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한 줄거리의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그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대목을 그 다음에 실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합편하면서 권의 편차와 문장에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이상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국가 혹은 왕가가 주도하여 제작한 국문 문학 작품으로, 국문의 문학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험, 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문의 문학적 기능이 관의 주도 아래 조심스럽게 실험,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에 심취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를 외면하고 여전히 한문을 문학 수단으로 삼았다. 일반 국민의 계몽과 교화를 위한 훈계서류의 언해와 세조와 같은 신심 깊은 군왕의 각별한 배려로 추진된 일련의 불경 언해 사업은 국문의 서사 기능을 더욱 개발하여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이루어진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언해(1464), 『선종영가집언해 禪宗永嘉集諺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심경언해 心經諺解』·『아미타경언해 阿彌陀經諺解』·『원각경언해 圓覺經諺解』·『목우자수심결언해 牧牛子修心訣諺解』, 성종 때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발원으로 인출한 『법화경언해』·『능엄경언해』·『원각경언해』 등, 그리고 『내훈』의 간행은 그 자체가 반드시 문학적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국문의 문학적 기능을 여러모로 확인시켜 주었다. 1481년 『두시언해 杜詩諺解』가 간행되고, 1484년 『연주시격 聯珠詩格』과 『황산곡집 黃山谷集』이 언해됨으로써 한시의 국역을 통하여 국문의 문학어로서의 기능이 거듭 확인되었다. 1493년 성현 등이 찬진한 『악학궤범 樂學軌範』은 「동동 動動」·「처용가 處容歌」·「삼진작 三眞勺」 등 고려의 가요를 국문으로 정착시켜 우리 가요 국문화의 본보기를 보였다. 성종 때 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 賞春曲」이 나왔고, 이어 1498년 조위(曺偉)의 「만분가 萬憤歌」가 나왔다. 16세기 초두 연산군의 언문 박해가 시작되면서 모처럼의 국문 문학 활동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각종 언해 사업이 재개되면서 국문에 의한 문학 창작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김구(金絿)의 「화전별곡」, 주세붕(周世鵬)의 「도덕가」·「오륜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기」 등 가사 작품이 창작되는 한편, 이현보(李賢輔)는 「어부가」·「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 등의 단가를 지었다. 여말 이래의 시조 문학의 전통은 국문의 구사를 통해 조선에서 더욱 그 지반을 다져 나갔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송순(宋純)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유희춘(柳希春)의 「헌근가 獻芹歌」·「감군은가 感君恩歌」,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장진주사 將進酒辭」,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 早紅枾歌」,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 江湖戀君歌」 등이 나왔다. 광해군 때 윤선도(尹善道)는 「견회요 遣懷謠」·「우후요 雨後謠」·「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몽천요 夢天謠」 등 국문 문학의 정수로 일컬을 만한 수작을 내놓아 순수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문학어로서의 국어의 면목을 드러내었다. 이 밖에도 시조를 남긴 이는 이이(李珥)·권호문(權好文)·이정환(李廷煥)·김상용(金尙容)·황진이(黃眞伊)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가사 문학도 시조에 못지 않게 사대부들이 즐겨 지었던 국문 문학의 장르였다. 조선 초기에 국문이 소외되었던 것과는 달리, 중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나 문학 담당 계층인 사대부들의 국문에 대한 인식이 다소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국문 문학에 대한 문학으로서의 인식은 그다지 철저했던 것 같지는 않고, 득의(得意)의 자리나 실의(失意)의 자리에서 손쉽게 소회의 일단을 토로하고 울적한 심사를 해소할 수 있는 표출 수단, 아니면 ‘몽매한 백성’을 깨우쳐 타이르는 교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들이 부른 국문 가요는 대부분 연향(宴享)의 자리에서 가창했거나 배소(配所)에서 읊조렸던 것이다. 가사 문학에서는 16세기 후기 정철의 「성산별곡 星山別曲」·「관동별곡 關東別曲」·「사미인곡 思美人曲」·「속미인곡 續美人曲」 등의 작품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관동별곡」을 비롯한 그의 가사 3편은 일찍부터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가사 문학의 수준을 한 층 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정철에 이르러 가사 문학은 국문학의 진수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명종 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 關西別曲」, 양사언의 「미인별곡 美人別曲」, 이황의 「환산별곡 還山別曲」·「금보가 琴譜歌」, 선조 때 이이의 「자경별곡 自警別曲」, 송순의 「면앙정가 俛仰亭歌」,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 雇工答主人歌」, 휴정(休靜)의 「회심곡 回心曲」, 허강(許橿)의 「서호별곡 西湖別曲」,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 百祥樓別曲」, 박인로의 「태평사 太平詞」·「선상탄 船上嘆」·「사제곡 莎堤曲」·「누항사 陋巷詞」 등이 지어졌고, 그 뒤에도 광해군 때 조우인(曺友仁)의 「산새곡 山塞曲」·「매호별곡 梅湖別曲」·「자도가 自悼歌」·「관동별곡 關東別曲」, 인조 때 박인로의 「영남가 嶺南歌」 등 사대부의 가사 작품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불교 경전과 유교 경전의 언역 사업에 이어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 등의 번역(15세기 후기 및 1518년), 『열녀전 列女傳』의 언해(1543), 불교 영험담류(佛敎靈驗譚類)의 언해 등은 국문에 의한 설화류의 서술 가능성을 더욱 성숙시켜 갔다. 중종 6년(1511) 채수(蔡壽)가 지은 「설공찬전 薛公瓚傳」(한문)은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금서 처분되었는데, 1996년 그 국역본 「설공찬전」이 발굴(이복규)됨으로써 역어체 국문 소설의 소설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 연간에 보우(普雨)가 찬술한 것으로 보이는 『권념요록 勸念要錄』은 11편의 불교 영험담을 한문과 국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짧은 10편은 중국에 원전을 두고 있는 설화이나, 맨 앞에 실린 「왕랑반혼전 王郎返魂傳」은 고려간본 『아미타경 阿彌陀經』(1304)에 수록된 「왕랑전 王郞傳」(한문)이 원전으로 간주되는 바, 이는 『궁원집 窮原集』 인문(引文)이다. 보우는 한문본 「왕랑전」을 윤색, 증연하고 다시 이를 국문으로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발생의 국문 소설은 한문을 발판으로 하여, 이를 번역함으로써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의 역어체 국문 문체는 문학어로서 아직 미흡한 단계의 생경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인 국문 소설의 문체는 광해군 때 허균(許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 洪吉童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난정 때의 인목대비(仁穆大妃) 서궁유폐사건의 전말을 그린 「계축일기 癸丑日記」는 궁인이 쓴 실기인 듯한데, 생생한 묘사와 정감 어린 문체는 국문 서사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역시 궁인의 작으로 보이는 「산성일기 山城日記」는 국문으로 쓴 실기로, 같은 제재를 다룬 허구적 수법의 전쟁 소설과 그 서술의 사실성에 있어 대조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문 서사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에 이어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 九雲夢」·「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등 비교적 문학성 높은 본격소설이 국문으로 창작되었다. 「구운몽」은 국문·한문 양본이 전하는데, 한문 원본설이 지배적이다. 18세기 이후 국문 문학은 괄목할 만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시가 분야에서는 『청구영언』·『해동가요 海東歌謠』·『고금가곡 古今歌曲』 등 가곡집의 편찬에서 보이듯 국문 가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시조에서는 서사성과 풍자성이 강한 사설시조가 출현하게 되었고, 가사에서는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 작품이 나왔다. 한편, 안조환(安肇煥)의 가사 「만언사 萬言詞」, 이세보(李世輔)의 「신도일록 薪島日錄」 등 유배 생활의 신고를 다룬 국문 작품도 있다. 소설은 군담류(軍談類)·염정류(艶情類)·전기류(傳奇類) 등 각종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궁정문학으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 閑中錄」은 사실적인 필치와 세련된 조사(措辭) 등 실로 국문문학의 백미편이라 이를 만하다. 19세기 중엽 한산거사(漢山居士)의 장편 가사 「한양가 漢陽歌」는 수도 한양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봉건 사회의 생태를 은연중에 풍자하고 있다. 이 무렵 경판(京板)·완판(完板)의 방각소설이 간행되면서 국문소설은 독자의 폭을 점차로 넓혀갔다. 1906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언문 일치의 국문 문체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국문 소설도 신소설과 함께 공존하면서 새 인쇄술에 의한 ‘딱지본’으로 꽤 널리 보급되었다. 가곡집으로는 『남훈태평가 南薰太平歌』·『여창가요록 女唱歌謠錄』·『가곡원류』 등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국문 가요를 여러모로 총정리한 것이었고, 개인 시조집으로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이세보(李世輔)의 『풍아 風雅』가 나왔다. 시조에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담으려 하였다. 가사 문학도 전통적인 국문 문학이 새로운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변신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새로운 국문 문학 양식이 태어나고 있었다. 신소설·신시·창가 등이 국문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하며 나타났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의의와 활용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어문 생활은 사대부인 양반층의 한문과 서리인 중인층의 이두로 나누어진 이원 체제였다. 즉 음성 언어로는 국어를 사용하면서, 문자 언어로는 양반층은 한문, 중인층은 이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니, 문자 생활에서 새로운 문자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언문이라 불린 이 새로운 문자는 주로 신(臣)이 아닌 민(民), 즉 서민의 글이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나라에서는 그 자습서에 해당하는 『훈민정음해례』를 편찬하는 한편, 과거에 훈민정음을 과하고,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한자음을 표기할 때 사용하던 반절을 대신하게 하였다. 또한, 개국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와 부처를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 및 『석보상절』을 간행하여 신문자의 효용성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세종대인 1449년 정승을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을 만큼 주효하였다. 신문자의 철자법은 당초부터 표음적인 음소 표기와 표의적인 형태 표기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관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형태 표기이고 『석보상절』은 음소 표기인데, 특히 음소 표기였던 『월인천강지곡』은 인쇄 후 형태 표기로 고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해례』 종성해에서 예를 들어 양자를 논하면서 8종성으로 가히 족하다고 단정함으로써 공식적 방침이 천명되었다. 이 결론은 평민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에 평민을 위한 철자법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것이며, 정책적으로도 매우 현명한 판단임에 틀림없다. 한편, 한자음 표기는 1448년 완화된 현실음을 교정한 『동국정운』을 간행하여 시행에 옮겼다. 자모(字母)와 운모(韻母)를 모르는 서민층은 수용하기 어려웠지만, 기록상으로는 1481년 『두시언해』 초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실시되다가 폐지되었고, 1496년(연산군 2) 『육조법보단경언해 六祖法寶壇經諺解』에 이르러 50년 만에 현실음으로 되돌아갔다. 훈민정음은 애초부터 서민을 위해 창제된 글인만큼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식자층은 『훈민정음해례』를 통해 쉽게 익힐 수 있었고, 서민층은 이를 재조정한 방식으로 배웠다. 1527년 『훈몽자회』 범례에는 반절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종조 성현의 『용재총화』에 ‘초종성팔자, 초성팔자’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반절식이 고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찍부터 식자층은 여성과 서민층을 상대하기 위해, 여성과 서민층은 자신을 위해 각각 신문자를 배움으로써 신문자는 널리 확산되어갔다. 위에 열거한 국어 작품들이 창작되고 한서(漢書)의 언해와 역학서 등 많은 글이 퍼지면서 신문자는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의 불경 언해, 사대부의 가사와 시조, 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한서의 주해 및 번역, 계층을 초월한 전교(傳敎)와 편지 등은 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보아 매우 특이한 일인데, 주로 문자가 없던 평민과 여성층에게 주어져 이들에 의해 전승되며 정착되었다. 당시 한문을 모르는 계층이라는 점에서는 여성은 서민층에 속해 있었다. 연산군 때인 1504년 일어난 투서사건으로 인해 한때 언문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러한 문자 생활의 3원 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또한, 음소 표기 철자법이나 반절식 문자 교육도 다소 변천을 겪으며 계승되었다. 특히, 순언문의 시가와 소설이 점차 유행하면서 언문은 많은 평민 및 여성층에게 친숙하고 불가결한 글이 되었다. 한글의 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초기의 정음시대와 1504년 연산군의 금란(禁亂) 이후 개화기까지의 약 400년을 기간으로 하는 언문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한글의 변천을 놓고 보면,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크게 양분된다. 17세기는 병자호란이 잇따랐고, 실학파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중세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제 당시처럼 어떠한 어문 정책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철자법이 자연적 흐름에 맡겨져 간소화되면서 규범이 불확실한 양상을 띠었다. 이는 공식적인 언어 문자의 교육이 없었던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언문은 아녀자와 서민층에게 반절식으로 가르쳐졌고, 그 철자법은 이들 개개인에 의하여 임의로 쓰여지면서 수세기가 흘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철자법은 대개 중종 때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지향 없이 표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창제 당시에 규정한 음소 표기의 원칙은 계속 전승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일어난 실학 운동은 새로운 조선학(朝鮮學)이 형성되게 하고, 이 조선학의 형성은 아름다운 근세적 정음문학(近世的 正音文學)의 융성과 함께 정음 연구를 근세적 문자음운학(文字音韻學)으로 부흥시켰다. 실학은 본질적으로 근대적 현실성과 민족적 주체성을 지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학파의 저술로서 정음에 관한 논술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으나, 그 주류를 이룬 것은 최석정(崔錫鼎)·이사질(李思質)·신경준·황윤석·유희의 저술 등 어디까지나 『주역 周易』을 바탕으로 한 한자음의 이상적 표기를 위한 연구였다. 동시에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고증학풍이 형성됨에 따라 물보류(物譜類)가 편찬되었다. 이들은 한문을 위주로 하고 있으나 국어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조선사서로 평가된다. 그 요인은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 무징불신(無徵不信)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휘집뿐만 아니라 방언과 속담의 수집, 어원의 탐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업적이 이루어졌다. 홍명복(洪命福)의 『방언집석 方言集釋』(1778)이나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 古今釋林』(1789) 등은 동양어 사전인 동시에 기초 어휘집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방언의 기록, 속담의 주석, 어원의 기술 등도 조선학의 일환으로 축적되었다. 특히, 순조 때 유희의 『물명고 物名考』 주석 곳곳에 등장한 무려 1,600여 개의 희귀한 우리말 어휘의 기록, 210개의 속담이 실린 정약용(丁若鏞)의 『이담속찬 耳談續纂』(1820)과 순조 때 300여 개의 속담이 수록된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등 속담집은 당시의 조선학이 뜻하는 근대 지향의 민족적 성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업적의 축적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이며, 조선 후기의 조선학이 최초로 이룩한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즉 근대화의 한 전초가 되는 사실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문자 학습이 반절식으로 행해졌음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데, 19세기에 유행하던 반절을 통해 어떻게 학습이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기로 한다. 이 반절표는 『훈몽자회』 범례의 언문 자모와 같은 문자 조직에서 유래한 것이나,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일본 이리에(入江萬通) 등의 『화한창화집 和韓唱和集』 권하에 수록된 일본통신사 종사관기실(從事官記室) 장응두(張應斗)의 조선 언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19년(숙종 45) 9월 일인에게 써 주었다고 하니 약 270년 전의 일이다. 그 뒤 거의 같은 양식의 반절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나, 1869년에 간행된 불서 『일용작법 日用作法』에 기록된 언본(諺本)은 좀 다르다. 1889년에 간행된 『신간반절』 1장도 이와 같은 종류이나, 신간 이전의 구판이 따로 있어 그 연대는 19세기 중엽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교육적으로 고안한 실례로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표4] 의 언본은 한자음으로 초성을 표시하고, [표 5] 의 반절은 그림으로 초성을 표시하였다. 「IMGI」83475-00「/IMGI」 가령, 언본은 ‘可’자를 보고 ‘가’행을, 반절은 그림 ‘개’를 보고 ‘가’행을 익히도록 한 것과 같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혼자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크게 기여했는데, 당시의 교육 방법이 흥미롭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 본문 15행(와워줄 포함)을 익히면, 제2단계는 이 본문에 받침 9자를 받치는 공부를 하고, 제3단계는 이들에 된시옷이 붙는 5행을 익힘으로써 완결된다. 이 방식은 아주 구조적이고 기계적이어서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다고 할 만큼 쉽다. 오늘의 교육에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모 구조와 그 철자 원리도 한글이 과학적 문자임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
한글 인쇄 활자의 기계화 문제
참고문헌
주석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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