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초록 열기/닫기 버튼

이 글은 ‘민족문화’를 둘러싼 개념투쟁이라는 시각에서 1970~1980년대 ‘민족문화’ 담론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민족주의의 문화 담론적 특징을 규명하려는 글이다. 근대민족주의가 태동한 이래 ‘민족문화’ 논의는 민족주의 담론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애초에 혈연적 민족주의가 아닌 문화적 민족주의로 출발하였으며, ‘국가’와 ‘민족’의 불일치가 가져온 모순은 ‘민족문화’ 담론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민족문화’ 담론은 민족을 단일한 공동체로 통합·해방·번영시키기 위한 미래완료형 프로젝트로서, ‘민족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내리기보다는 ‘민족문화’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전략적·실천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1970년대 ‘민족문화’ 담론이 민족문화육성론과 민족문화운동론으로 분화되는 과정에는 ‘민족문화’라는개념을 둘러싼 여러 개념, 곧 ‘전통문화’·‘민속문화’·‘민중문화’·‘대중문화’ 등의개념들 서로 간의 갈등과 쟁투가 있었다. 전자가 전통문화의 현대적 변용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민속문화의 공동체성 회복에 중점을 두고 각각의 논리를 전개하였으며, 양 진영은 모두 상업적 대중문화에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1980년대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앞선 시대보다 훨씬 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대표적 저항 세력인 대학생층과 그들의 문화인 민속 문화 및 대중문화를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문화정책을 펼쳤다. 이에 맞선비판적 지식인과 대학생 및 문화운동 진영에서는 민중문화를 기치로 내걸고 이것이 지배층이 전유하려는 ‘전통문화’ 및 ‘민속문화’와 어떻게 다른지를 논증하는과정에서 민중문화 개념과 담론이 형성되었다. 1987년 6월항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자는 ‘고급문화’의 대중화가, 후자는 ‘민중문화’의 대중화가 화두가 되었다. 이는 1990년대가 대중문화의 시대가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향후 민족주의가 ‘민족문화’라는 이념형 담론이 아닌 국민 정서로서 대중문화와 이를 생산·유통하는 문화산업의 외양을 띠고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것이기도 했다.

This paper seek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cultural discourse of Korean nationalism by investigating the evolution of the conceptual debate on “national culture” in South Korea during the 1970s and 1980s. The issue of national culture was prioritized from the very birth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which began as a cultural, rather than an ethnic, nationalism. The contradiction arising from the mismatch between the “nation” and the “state” thus became the primary driver propagating the national culture discourse. The “nation” in this national culture discourse was understood as a project to be realised at some point in the future, as a single united, liberated and prosperous community. Thus, the national culture discourse defined “national culture” in strategic and practical terms: what it should be, rather than what it was. Later, in the 1970s, the national culture discourse split in two, giving rise to a national culture promotion discourse focusing on the modern adaptation of “traditional culture” and a national culture movement discourse emphasizing the restoration of the communal character of “folk culture.” These two schools of thought struggled over concepts such as “traditional culture,” “folk culture,” “people’s (minjung) culture” and “mass culture,” with both camps assuming a critical stance towards this last. In the 1980s, the new military faction that came into power proactively embraced culture, much more so than during the preceding Yusin era, enacting cultural policies to attract university students — the most serious force capable of resisting state power — into their system. During this period, the state deployed the concepts of “folk culture” and “mass culture,” whereas its intellectual critics and the university students of the cultural movement promoted “people’s (minjung) culture,” creating this concept in opposition to the concepts of culture monopolized by the ruling class. Following the June 1987 struggles for democracy and the 1988 Seoul Olympics, the national culture discourse became divided between those who favored “high culture” and those who preferred “people’s (minjung) culture.” This prefigured the situation of the 1990s, the age of “popular culture,” and also the decay of the national culture discourse within the framework of nationalism.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

,

,

,

,

,

,

,

,

,

,

,

national culture, traditional culture, folk culture, people’s (minjung) culture, mass culture, high culture, national culture promotion discourse, national culture movement discourse, cultural movement theory, cultural elite, Gukpung 81, Daedong festival, conceptual debates

피인용 횟수

  • KCI 11회

  • 429 회 열람
  • KCI 원문 내려받기
  • 논문 인용하기
  • 서지정보 내보내기

    • txt
    • RefWorks
    • Endnote
    • XML

  • 현재 페이지 인쇄

인용현황

고도 대중 소비 사회의 성장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1960∼1970년대의 대중 소비 사회를 지나 1980년대가 되면 한국 사회는 고도 대중 소비 사회로 이행한다. 고도 대중 소비 사회라는 개념은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W. W. Rostow)가 봉건시대부터 현대 사회까지의 경제 발전 단계를 설명하면서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봉건시대부터 현대까지의 경제 발전은 전통 사회·도약 준비 단계·도약 단계·성숙 단계·고도 대중 소비 단계의 다섯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현대 선진국은 마지막 단계인 고도 대중 소비 사회에 속해 있다고 하였다. 고도 대중 소비 단계에서는 산업 체제가 생산재 생산에서 소비재 생산으로 변화하고, 사회 보장 제도의 발달로 일반 대중의 소득이 증대하여 소비 생활 수준이 높아지므로 대중 소비가 사회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는 고도 대중 소비 사회의 특징으로 첫째 한 나라에서 샐러리맨 등의 근로자 인구가 정직업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둘째 소득 혁명, 즉 근로자 계층의 소득 수준이 소득 격차를 줄이면서 급상승하며, 셋째 총수요에서 차지하는 소비 수요의 비중이 2분의 1을 초과하여 소비 수요가 경제 성장을 유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을 들었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소비 수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비를 자극하지 않으면 경제 성장은 정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 성장을 지속하려면 항상 소비 수요를 자극해야만 하며, 이 소비 수요의 자극 요인 가운데 광고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 스위찌(P. M. Sweezy)는 “광고는 어떤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을 공장과 설비에 대한 투자를 조장한다. 실업과 유휴 시설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자원은 이용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될 것이다. 광고는 투자와 소득의 순익을 발생시킨다. 판매 노력은 불황에 빠질 수 있는 독점 자본의 경향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이는 광고가 모든 유효 수요를 증대시키고 소득과 고용의 수준을 상승시키는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광고는 현대 사회의 제도로서 존재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광고비의 증가와 경제 성장률이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고와 경제 활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고도 대중 소비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진 제국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화가 달성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요한 그리고 질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를 통해 유신 체제의 대외 의존적이며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과 이를 위한 경직된 정치 구조 속에서 누적되어 온 대중의 불만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다. 대중이 정치적으로 각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영역이었던 미국은 곧 선(善)이라는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5·18 민주화 운동 이전의 민주화 세력 혹은 민주화 운동과 다른 질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광복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독재, 친미, 대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자본가 중심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던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세계 무역 기구 체제의 출범>   
『동아일보』 1995년 1월 1일자에 실린 기사로, WTO 체재의 출범을 보도하고 있다. WTO 체제의 등장으로 자유 무역이 자리 잡아 국제 경쟁력이 없는 산업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가 취약한 농업 분야는 이 체제의 등장으로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첫째, 세계 무역 기구(WTO) 체제의 등장으로 자유 무역이 자리 잡아 산업 전반에 걸쳐 초국가 기업의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이른바 ‘국제 통화 기금(IMF) 사태’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국부의 유출 논쟁까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제한 조치가 해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하여 굳게 닫았던 문호를 열었고, 문화 산업의 경쟁력 또는 문화 산업의 보호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광복 이후부터 줄곧 통제되었던 일본의 대중 문화가 한국의 대중들에게 직접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우려는 예상과 달리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대중 문화가 이미 일본의 대중 문화 수용에 대해 자주적인 자세와 경쟁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텔레비전 드라마 ‘겨울 연가’, ‘대장금’ 등의 성공은 일본에서 이른바 ‘한류(韓流)’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셋째, 특히 1990년대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신세대 문화이다. 김영삼 정부의 수립을 전후한 시점에서 주로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중산층 신세대의 소비 문화를 겨냥하여 시작된 신세대 문화 논쟁은 한동안 1990년대 문화 지형을 가늠하는 중심 주제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1980년대에는 통행금지 해제, 교복과 학생 머리 모양의 자율화, 경제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등 일련의 개방 정책을 통해 일상생활이 개방적인 사회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었고 신문이 컬러로 발행되었으며, 프로 스포츠 시대가 개막되는 등 소비 품목, 소비 생활의 양식 자체가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1980년대에는 이전 시기와 질적으로 다른 소비 문화가 정착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시장 개방의 압력에 따라 한국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WTO 체제의 등장과 함께 사실상 완결되었다.255) 이러한 상황을 가속화시킨 것은 김영삼 정부가 경쟁력 강화를 주된 논리로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이에 문화 산업 전반에 걸쳐 그동안의 규제 정책에서 탈피하여 문화 산업에 대한 대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였다. 그 결과 대자본이 케이블 티브이(Cable TV·CATV), 지역 민방, 위성 방송, 통신 산업, 영화 산업 등에 참여하여 문화 산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특히 영화 산업의 경우에는 미국의 직배사(直配社)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여 한국의 영화 시장을 지배하고자 의도하였고, CGV와 메가박스 같은 대자본의 참여로 중소 영화관이 문을 닫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이제까지 문화 전반을 규정하던 정치 논리 대신 대자본의 경제 논리가 문화 산업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WTO 체제의 성립과 문화 산업에 대한 대자본의 참여는 대중 문화 시장의 급속한 확대를 낳았다. 한 해 동안 개봉되는 영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화가 1980년대 중반에는 100여 편에서 1990년대 말에는 400여 편으로 증가하였고, 음반 시장은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하였으며, 케이블 티브이·이동 전화·인터넷 등 새로운 매체의 이용자 수도 급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말부터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영상 산업을 비롯한 대중 문화 산업의 시장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된 결과였다. 그리고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채널의 확대에 따라 가속도가 붙었다. 우리나라의 이동 전화와 인터넷의 보급률과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산업의 성장은 IMF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국가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 편이 거두어들이는 수익이 자동차 10만 대를 수출하여 얻는 수익보다 많다는 사례를 들어 문화 산업의 육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시장의 확대는 한국의 문화 시장이 선진국의 초국가적 문화 산업의 영향권에 사실상 편입됨을 의미한다. 영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미국 영화가 개봉 편수로는 1997년 17.5%, 1998년 23.7%, 1999년 25.8%로 증가하였으며 관객 비율로는 1997년 49.5%, 1998년 67.3%로 거의 70%에 육박하였다. 이는 극장에서 기준 일수 이상 반드시 국산 영화를 상영하도록 한 스크린 쿼터(screen quota) 제도의 뒷받침 속에서 나타난 결과라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가 점차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는 심지어 한국의 영상 산업이 보호 정책 때문에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였다고 비판받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WTO 체제 속에서 강제된 문화 시장의 개방은 당연히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국내 문화 산업의 위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영화인의 열정과 콘텐츠의 개발로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 속에서도 꿋꿋이 50% 내외의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관객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영화인들의 스크린 쿼터 사수 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스크린 쿼터 제도를 지키려는 국내 영화인의 노력은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지지를 얻고 있어 할리우드 자본의 침투에 대한 국제적 연대 활동의 한 전형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스크린 쿼터제 철폐 반대 시위>   
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규정한 스크린 쿼터 제도를 축소하려는 정부의 의도에 반대하여 대학생들이 스크린 쿼터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화와 함께 대중 문화 산업의 주요 영역인 음반 산업도 1990년대 내내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져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까지 한국 음반 시장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였다. 음반 산업도 역시 시장 개방 과정 속에서 초국가 미디어 산업의 진출이 이루어졌으며, 국내 대기업의 진출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외국계 직배사와 대기업의 음반 산업 진출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중소기업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 음반 산업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의 대중 음악 시장은 영화와 달리 국내 가요가 미국 팝송 중심의 서구 대중 음악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가 곧 한국의 음반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력이나 유통망 등에서 초국가 기업에 비해 한국의 음반 산업은 크게 열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국 대중 음악의 대부분이 ‘토착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서구 특히 미국 대중 음악의 모방이거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의 대중 음악이 대중의 의식을 서구적이거나 미국적인 것으로 오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한편 1990년대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신세대 문화이다. 1990년대의 신세대란 이전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던 신세대와 극적인 차별성을 갖는다. 이전의 신세대가 기성세대의 충고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면 1990년대의 신세대는 이를 아예 무시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자신을 주장하였다.256) 이러한 신세대가 탄생하는 가장 큰 근거라 할 수 있는 것은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지적하였듯이 사회적·역사적 과정 속에서 공통의 위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사회적 경험이 구세대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세대는 분명 대중 소비 사회에서 출현하며 신세대의 감성과 사고방식, 생활양식은 철저히 소비적인 범주의 것임은257) 틀림없는 것 같다. 동시에 신세대는 탈이념적이며 정보화 세계에서 성장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기성세대의 관점에서는 이들의 무절제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달리 보면 기성의 권위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은 좀 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세대를 보는 시각도 다양하다. 즉 단순히 어려웠던 시절을 모르는 철없는 젊은 애들이라는 시각, 자기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라는 시각, 감성 세대의 주요한 소비층이라는 시각, 자유로운 자기 표현에 기반하여 새로운 대중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집단으로 보는 시각258)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지배적인 것은 신세대란 철없는 어린애라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이른바 ‘신세대 문제’가 나타난다.

신세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이른바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젊은 세대의 소비 양상이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렌지족은 대개 1970∼1980년대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고 강남 지역에 뿌리 내린 부유층 2세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오렌지처럼 연하고 밝고 나긋나긋한 것을 좋아하고, 사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철저한 개인주의와 향락적 소비 문화에 빠져 기성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경제적으로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활을 하였다. 또 사회 경제적 조건이 자신들의 형편에 맞지 않으면서도 오렌지족을 모방한 ‘낑깡족’, ‘탱자족’까지 나타난 것은 이들을 동경한 청소년층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오렌지족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친 경제 성장과 민주화 과정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개방이 이루어지자 그동안 억눌렸던 기성세대의 무차별적인 소비와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과소비 풍조의 만연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광고업계에서는 당연히 소비의 한 주체로 성장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고는 단순한 상품 소개만으로는 신세대의 눈길을 끌 수 없다고 보았다. 이제 광고는 단순한 광고로서가 아니라 신세대의 소비 문화와 일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비 문화는 1990년대 이후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광고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상품 소비는 단순한 물질적 소비가 아니라 정신적 소비와 서비스 소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하였다.259) 그리하여 이 시기 광고에는 신세대 문화의 코드가 반영되었다.

한편 1990년대 신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한 본격적인 영상 세대라는 점이다. 1990년대 들어 이들의 문화가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 이유도 이들이 정보 통신 혁명과 함께 도래한 영상 매체 중심의 문화적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고 그만큼 영상 산업의 가장 중요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 통신 혁명과 함께 시작된 다매체·다채널 시대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적 중심을 영상 매체로 이동시키고 있고, 그 과정에서 영상 세대의 문화적 감성은 기존의 문화적 질서에서 일탈한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신세대가 향유하는 문화는 어떠한 형태일까?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기능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들의 문화적 감수성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은 락 카페, 24시간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는 MTV, 사방을 투명한 유리로 장식한 커피 전문점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의 특징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에 있다. 특정한 중심을 설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탈중심적인 것이다. 바로 탈중심적인 것, 이것이 1990년대 신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세대 스타일은 당시 사회적 관심을 모은 문화적 양상, 곧 영상 세대적 감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신세대의 탈중심적이며 영상 세대적 특성은 광고에도 반영되어 이효리가 출연한 애니콜 광고나 보아가 출연한 현대 카드의 광고처럼 마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텔레비전 광고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더욱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대기업의 자본의 논리와 맥이 닿아 있다. 즉 신세대의 문화적 욕구는 이들의 시장성을 재빨리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 대기업 문화 자본에 의해 소비적인 형태로 해소되었던 것이다.

영상 세대라는 점과 함께 1990년대 신세대의 다른 특징은 이들이 1960년대 이래 급속도로 진행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려 적극적인 소비 행태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들은 과거 어느 세대에 비해서도 막강한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 영상 세대로서 달라진 감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소비를 통한 새로운 스타일의 추구를 택하였다. 이들은 이 새로운 스타일을 개성이라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신세대 문화는 소비 지향적이라는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세대 소비 문화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편입된 것과 동시에 신세대의 집단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은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고 남북 간의 이질성을 해소하려는 논의가 진전되면서 이념 대립이라는 기존의 틀을 탈피하게 되면서 나타난 특징이었다. 곧 문화가 정치적·이념적 대립의 구조에서 벗어나 계급적·계층적·지역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헤게

1980년대 한국 문화 - 1980nyeondae hangug munhwa
모니 갈등의 영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기존의 정치적 억압에 억눌려 있던 대중 문화에 쾌락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광고를 비롯하여 영화, 대중 음악, 드라마 등 대중 문화 전반에서 성(性)과 육체에 대한 쾌락주의적 경향은 점점 심화되었다.260) 이런 경향은 문화 전반에서 탈정치화가 계속 빨라지고 문화 산업의 시장 논리와 맞물리면서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구매력과 소비 성향을 갖춘 신세대의 등장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를 실시하여 상품의 판매를 증대시키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교적 새로운 문화 산업 영역으로 등장한 육체 산업, 패션 산업, 영상 산업, 요식 산업 등 소비 산업에서는 신세대를 가장 강력한 소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필자] 조성운